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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특별기고] 독립선언문 낭독자, 용기 있는 해주청년 정재용(鄭在鎔)을 숭모하며..


옴부즈맨 기자 / ombudsmannews@gmail.com입력 : 2017년 02월 28일 17시 23분
↑↑ 1919년 3.1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고 정재용 옹
ⓒ 옴부즈맨뉴스

지금부터 98년전 3.1 파고다공원(현 탑골 공원)에는 학생과 시민 5000명 이상이 모였다.
이들은 이날 이곳에서 민족 대표, 종교계 대표, 학생 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것을 알고 점 조직을 통해 미리 알고 모여들었다.

더구나 이 날은 고종 황제의 인산(因山 장례일 3.3) 기간이라 일본 경찰이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거사일을 정했다. 정오가 다가오자 공원 안에 빽빽이 모인 학생.시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 1919.3.1 독립선언을 하기위해 각 단체 대표 33인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는 장면
ⓒ 옴부즈맨뉴스

독립선언을 하겠다던 민족대표 33인은 유혈사태 운운하며 인근 태화관(명월관의 분점)에 모여 숨을 죽이고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이때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공원을 초조히 오가던 나이 서른셋의 청년은 그것이 불만스러웠다. “아 이 영감태기들같으니. 대체 이게 뭐하자는 짓이야.” 가끔 투덜거리는 혼잣말에는 황해도 말투가 배어 있었다. 그는 해주 사람으로 서울 경신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에서 감리교회 전도사로 일하던 정재용이었다.

그는 2주쯤 전 서울에서 인편으로 보내온 편지를 보고 온몸이 떨리던 순간을 떠올렸다. “독립선언. 날짜는 3월 1일. 파고다 공원 정오. 재정은 천도교가 대고 인원 동원은 기독교가 맡소. 때맞춰 상경하시오.” 이제 때가 왔구나. 고종 황제 인산을 핑계로 해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정재용은 경신학교 시절 음악 강사 김인식이 가르쳐 주던 ‘애국가’ 가사의 기억을 짜내며 입안에서 혀를 오물거렸다.

올드랭사인에 맞춘 동해물과 백두산이..... 그 노래를 가르치다가 경찰에 끌려가 ‘풍기문란’ 혐의로 감옥살이를 했던 김인식의 얼굴도 스쳐갔다. 나라가 망했다고 통곡이 진동한지 근 10년. 이제야 조선 독립의 성(聲)이 터지누나 싶었다.

준비는 착착 진행됐다. 독립선언문은 천도교 계열 출판사에서 인쇄했고 각 지방의 교회로 독립선언서가 보내졌다. 2월 28일 아침 미처 원산 지역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지 않은 것을 알고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였던 김창준의 부탁으로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가 경원선 열차에 올라타는 전도사 곽명리에게 선언서를 쥐어줄 때만 해도 다음 날이면 이 모든 긴장이 시원스럽게 터져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파고다 공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기와 머리를 맞댔던 YMCA의 박희도, 원산 가는 전도사에게 독립선언서를 갖다 주라고 발 동동 구르던 김창준을 비롯하여 서른 세 명이라는 민족 대표는 파고다 공원 어디에도 없었다.

전해들은 이유는 좀 어이가 없었다. “그렇잖아도 고종께서 슬픈 운명으로 승하하시어 마치 인산(因山)날이라 백성들의 심리가 극도에 달해 있는 이때에 파고다 공원에 모인 학생과 군중이 일심하여 다 같이 만세를 부르며 시가로 행진하여 나가게 될 것이고, 그들은 또 전국에서 인산에 참가하기 위하여 올라온 수많은 시민들과 합세하게 된다면 유혈이 극심하게 될 터이니, 이를 염려” 하여 독립선언을 파고다공원이 아니라 태화관 식당에서 한다는 게 아닌가!

“이거야 원. 전쟁을 안방에서 하겠다는 거 아닌가.” 어떻게 이 절호의 기회에 대표라는 사람들이 유혈충돌을 저어한다는 것인가. 그럼 일본이 독립선언에 감동하여 고이 아 그렇스무니까 우리는 물러가겠스무니다 할 걸 기대한단 말인가.

지난 2주간의 그 긴박한 준비와 죽음을 불사한 각오가 식당 특실에서 펼쳐지는 꼴이라니. 다윗이 팔매를 들고 골리앗에 나서는 게 아니라 자기 양을 향해 네가 골리앗이라고 선포하는 물색 아닌가.

나타나지 않는 민족대표들을 원망하며 애꿎은 돌부리를 차던 그의 눈앞에 거짓말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2시가 가까워오자 어디선지 검은 옷의 학생들이 무더기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학생동원책이었던 연희학교 김원벽과 보성학교 강기덕이 임무를 완수한 것이었다. 삽시간에 파고다 공원 경내는 수천 명의 학생들로 들끓었다. 황제의 인산날을 앞두고 인파가 모이는 것을 당연시한 방심일 수도 있었겠지만 일제 경찰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인파의 집결이었다.

불쏘시개는 마련됐고 사람들 마음에 기름은 이미 부어져 있었다. 다만 그 불을 당 길 불씨가 태화관 식당 방 안에서 작게 켜졌다가 꺼진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 1919.3.1 탑골공원에서 정재용 전도사가 독립선언문 낭독 장면을 벽면에  조각
ⓒ 옴부즈맨뉴스

이때 정재용의 머리 속에는 자신의 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종이 한 장이 퍼뜩 떠올라 온다. 천도교인들이 인쇄해 줬던 독립선언서. 행여 일제 경찰에 발각될까 옷 깊숙이 숨겨둔 빽빽하게 글자가 적힌 종이 한 장.

순간 많은 것이 스쳐갔다. 내처 내가 읽어 버릴까. 명색 민족대표들이 유혈을 우려하여 태화관으로 독립선언 장소를 바꿨는데 행여 내가 감당 못할 사태가 정말로 발생하면 어쩌나. 아무것도 아닌 시골 전도사인 내가 독립선언서를 읽으면 군중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잡혀가면 어떻게 될까. 일제의 입장에서는 반역을 꾀하는 셈인데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학생 대표 강기덕도 김원벽도 잠자코 있는데 내가 나서도 될까.

그때 정재용은 품 안에서 종이를 꺼냈다. 그러나 그 상단에 찍힌 두 글자, 독(獨)과 립(立)이 불화살처럼 그의 눈을 찔러 왔다. 왈칵. 머리에서 뜨거운 것이 내려왔고, 가슴에서는 10년을 쌓아온 가래가 불덩이가 되어 치밀어 올랐다. 마침내 정재용은 오랫동안 금기였던 두 글자를 입 밖에 내고 만다.

“조선” 조선...독립...선언서. 이 단어를 내뱉기는 그럴 수 없이 힘들었으나 이 말이 파고다 공원의 창공을 가르는 순간 수천 명의 가슴을 번갯불처럼 내리쳐 찢어 놓았다. 아! 곳곳에서 탄성 같기도 하고 신음 같기도 한 소리가 퍼져 나왔고 그 잡음들을 내리 누르며 정재용의 독립선언서 낭독이 시작됐다.

“오등은 자에 아 아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이제 파고다 공원 안에 들리는 소리는 오로지 정재용의 떨리는 육성뿐이었다.
처음에는 가늘던 정재용의 목소리는 점차 우렁차게 수천 명의 귀에 꽂혔다. 정재용이 평생에 잊지 못할 낭독을 마쳤을 때 군중은 일순 침묵했지만 한켠에서 흘러나온 소리에 화산처럼 폭발하고 말았다. “조선독립만세.”

누군가 온몸을 활처럼 꺾으며 두 팔을 하늘로 솟구치며 부른 만세였다. 한 마디에 눈물이 솟았고 만세 소리가 나오기 전에 뜻 모를 괴성이 공원을 뒤 흔들었다. 그리고 이어진 조선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만세! 만세! 이렇게 해서 파고다 공원에서의 독립선언이 완성되었다.

이 심경은 당시에 유행했다는 노래 가사에 그대로 담긴다. “터졌구나 터졌구나 조선 독립의 성. 십 년을 참고 참아 인제 터졌네. 뼈도 조선 피도 조선 이 피 이 뼈는 살아 조선 죽어 조선 조선 것일세.”

↑↑ 1919.3.1 대한문에 모여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있다.
ⓒ 옴부즈맨뉴스

이날 정재용이 끝내 용기를 내지 못하고 독립선언서를 읽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으나 최악의 경우 3.1 항쟁은 늙다리 몽상가와 얼치기 기독교인들이 자칭 민족대표랍시고 음모를 꾸몄다가 겁이 나서 태화관 식당에서 만세 부르다가 잡혀간 해프닝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상기된 표정으로 모여든 수천 명의 학생들도 “에이 어느 놈이 이런.....” 하면서 강기덕과 김원벽을 타박하며 덕수궁 앞에 나가 곡이나 하고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 시골 교회 전도사 정재용이 있었고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날 중의 하나인 3월 1일은 천고의 빛을 얻는다. 그렇게 역사는 평범한 사람에게 운명의 반지를 끼워 주기도 한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 뭉클한 청년 정재용,

그는 일찍이 상경하여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해주의 초라한 한 감리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며 복음을 전파하는 소박한 믿음의 청년이었다. 이 일로 같은 해 8월 체포되어 평양 감옥에서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감옥생활을 하였다.

출옥한 뒤에는 독립운동 단체인 의용단에 참가하여 서광신, 이기춘 등과 함께 항일운동에 진력하였다.

수양산인은 해방이후 북한에서 김일성이 1947년 북한국기인 ‘홍람오각별기(인공기)’를 제작하자 태극기 존속을 갈하게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인민들은 왜정의 혹정 밑에서 쓰라린 시기에도 태극기를 간직하고 그것을 떳떳하게 띄울 날을 하루같이 원했다. 해방된 조국 인민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해방의 감격과 기쁨에 어쩔 줄 몰랐으며 희망의 태극기를 받들고 하늘이 진동하게 노래를 불렀다. 복조선 인민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남조선 인민들도 역시 한결같이 이를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극기는 ‘통일의 무기’이다” 그 이후 그는 김일성치하에서 통일운동을 하다 서울로 돌아왔다.

정재용 옹은 호는 수양산인이다. 1886년 해주에서 태어나 1976년 서울에서 향년 91세로 돌아가셨다.

그는 7남을 두었다. 장남은 수양산인이 옥살이를 하는 동안 아버지를 생각하여 냉방에서 기도에 전념하시다가 냉해로 병을 얻어 돌아가셨고, 둘째이셨던 정사영 박사는 당시 세브란스병원과 쌍벽을 이루며, 이승만 대통령의 주치의를 담당했던 서울위생병원의 원장으로 오랫동안 시무하셨으며, 6남인 정우영 박사 역시 위생병원에서 외과부장을 엮임하셨다. 그 외에 자녀들은 해방 후 서울대교수 등으로 계셨으나 6.25 납북되었고, 손자들도 대부분 미국과 우리사회에 의술로 봉사를 하고 있는데 특히 정우영 박사의 차남 정성화 박사는 보스톤치과 원장으로 있으면서 “긴급지원은행” 회장 등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 북한산 백운대 정상에 새겨진 3.1운동 암문각
ⓒ 옴부즈맨뉴스

지금도 서울의 북한산(836m) 최고 암봉(岩峰)인 백운대에는 한자 69자가 해서체로 암각되어 있다. 이 글은 독립운동가인 정재용이 3.1운동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의 일단을.. 일제의 눈을 피해, 후세에 길이 알리기 위해 새겨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위 네 귀퉁이에 경천애인(敬天愛人, 하늘을 우러르고 사람을 사랑한다)의 네 글자를 파 놓고 “독립선언문은 기미년 2월 10일 육당 최남선이 썼고, 3월1일 탑골공원에서 정재용이 독립선언 만세를 이끌었다.”라는 내용을 한자로 새겨놓았다. 시기는 광복 이전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글  시민옴부즈맨공동체 상임대표 및 본지 발행인 김형오
ⓒ 옴부즈맨뉴스




독립선언문 전문

↑↑ 독립선언문 전문
ⓒ 옴부즈맨뉴스

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된 나라인 것과 조선 사람이 자주 하는 국민인 것을 선언하노라.

이것으로써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밝히며,
이것으로써 자손만대에 일러 겨레가 스스로 존재하는 마땅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도록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고 이것을 선언하는 터이며,
이천만 민중의 충정을 모아 이것을 널리 알리는 터이며,
겨레의 한결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것을 주장하는 터이며,

사람 된 양심의 발로로 말미암은 세계개조의 큰 기운에 순응해 나가기
위하여 이것을 드러내는 터이니

이는 하늘의 명령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아 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므로,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것을 막고 누르지 못할 것이라.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강권주의에 희생을 당하여 역사 있은지 여러 천 년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눌려 고통을 겪은지 이제 십 년이 되도다

우리가 생존권마저 빼앗긴 일이 무릇 얼마며,
정신의 발전이 지장을 입은 일이 무릇 얼마며,
겨레의 존엄성이 손상된 일이 무릇 얼마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백과 독창성을 가지고 세계 문화의 큰 물결에 이바지할 기회를 잃은 일이 무릇 얼마인가!

오호, 예로부터의 억울함을 풀어보려면, 지금의 괴로움을 벗어나려면,
앞 으로의 두려움을 없이 하려면,
겨레의 양심과 나라의 도의가 짓눌려 시든 것을 다시 살려 키우려면,
사람마다 제 인격을 옳게 가꾸어 나가려면

불쌍한 아들, 딸에게 부끄러운 유산을 물려 주지 않으려면,
자자손손이 길이 완전한 행복을 누리게 하려면,
우선 급한 일이 겨레의 독립인 것을 뚜렷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천만 각자가 사람마다 마음속에 칼날을 품으니,
인류의 공통된 성품과 시대의 양심이 정의의 군대가 되고,
인륜과 도덕이 무기가 되어 우리를 지켜주는 오늘,

우리가 나아가 이것을 얻고자 하는데 어떤 힘인들 꺾지 못하며,
물러서 계획을 세우는데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할까
1
병자수호조약 이후, 시시때때로 굳게 맺은 약속을 저버렸다하여 일본의 신의 없음을 탓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인은 실생활에서 우리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이 터전을 식민지로 삼고,
우리 문화민족을 마치 미개한 사람들처럼 대하여 한갓 정복자의 쾌감을 탐낼 뿐이요

우리의 영구한 사회의 기틀과, 뛰어난 이 겨레의 마음 가짐을 무시한다 하여, 일본의 옳지 못함을 책망하려 하지 아니 하노라

자기를 일깨우기에 다급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원망할 여가를 갖지도 못하였노라.
현재를 준비하기에 바쁜 우리에게는 예부터의 잘못을 따져볼 겨를도 없노라.

오늘 우리의 할 일은 다만 나를 바로잡은 데 있을 뿐,
결코 남을 헐뜯는데 있지 아니하도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을 따라 자기집의 운명을 새롭게 개척하는 일일 뿐,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의 감정을 가지고 남을 시기하고 배척하는 일이 아니로다.

낡은 사상과 낡은 세력에 얽매인 일본 위정자의 공명심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부자연스럽고 불합리한 이 그릇된 현실을 고쳐서 바로잡아,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올바른 바탕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 겨레가 원해서 된 일이 아닌 두 나라의 합병의 결과는 마침내 억압으로 이뤄진 당장의 편안함과, 차별에서 오는 고르지 못함과 거짓된 통계숫자 때문에, 이해가 서로 엇갈린 두 민족 사이에 화합과 수 없는 원한의 도랑이 날이 갈수록 깊이 패이는 지금까지의 사정을 한번 살펴보라.

용감하게 옛 잘못을 고쳐 잡고, 참된 이해와 동정을 바탕으로 우호적인 새 시대를 마련하는 것이, 서로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불러들이는 가까운 길인 것을 밝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

또한 울분과 원한이 쌓이고 쌓인 이천만 국민을, 힘으로 붙잡아 묶어 둔다는 것은 다만 동양의 영원한 평화를 보장하는 노릇이 아닐 뿐 아니라,
이것이 동양의 평안함과 위대함을 좌우하는 사억 중국 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두려움과 새암을 갈수록 짙어지게 하여,
그 결과로 동양 전체가 함께 쓰러져 망하는 비운을 초래할 것이 뻔한 터에, 오늘 우리의 조선독립은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정당한 삶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잘못된 길에 벗어나 동양을 버티고 나갈 이로서의 무거운 책임을 다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꿈에도 피하지 못할 불안과 공포로부터 떠나게 하는 것이며,
또 동양의 평화가 중요한 일부가 되는 세계평화와 인류복지에 꼭 있어야 할 단계가 되는 것이라.

이것이 어찌 구구한 감정상의 문제이겠느냐!

아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누나
힘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누나

지나간 세기를 통하여 깎고 다듬어 키워온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새 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 위에 던지기 시작 하누나

새봄이 온 누리에 찾아 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 하누나
얼음과 찬 눈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것이 저 한때의 시세 였다면, 온화한 바람, 따뜻한 햇볕에 서로 통하는 낌새가 다시 움직이는 것은 이 한때의 시세이니,

하늘과 땅에 새 기운이 되돌아오는 이 마당에,
세계의 변하는 물결을 타는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고 아무 거리낄 것도 없도다

우리가 본디 타고난 자유권을 지켜 풍성한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며,

우리가 넉넉히 지닌바 독창적 능력을 발휘하여 봄 기운이 가득한 온누리에 겨레의 뛰어남을 꽃피우리라

우리는 그래서 분발하는 바이라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고, 진리가 우리와 더불어 전진하나니, 남자? 여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음침한 옛집에서 힘차게 뛰쳐나와 삼라만상과 더불어 즐거운 부활을 이룩하게 되누나

천만세 조상들의 넋이 우리를 안으로 지키고, 전 세계의 움직임이 우리를 밖으로 보호하나니,
일에 손을 대면 곧 성공을 이룩할 것이라.
다만 저 앞의 빛을 따라 전진할 따름이로다.


[공 약 삼 장]

하나, 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찾는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고,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하나,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올바른 의사를 시원스럽게 발표 하라.

하나, 모든 행동은 먼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가 어디까지나 공명정대하게 하라.

나라를 세운지 사천이백오십이년 되는 해 삼월 초하루


[조선 민족대표]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전백, 양한묵,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일, 이종훈, 임예환, 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흥식, 신석구,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최 린,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옴부즈맨 기자 / ombudsmannews@gmail.com입력 : 2017년 02월 28일 17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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