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부즈맨 김형오박사 칼럼] 마지막 “살아있는 양심” 고 장기표 선생님을 추모하며...
옴부즈맨 기자 / ombudsmannews@gmail.com입력 : 2024년 10월 01일 09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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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옴부즈맨총연맹 상임대표 겸 옴부즈맨뉴스 발행인 김형오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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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영원한 재야(在野) 무관(無冠)의 장기표 선생님이 영면(永眠)에 들어갔다. 불과 1달 전만해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이게 나라냐, 기득권이 특권을 내려놓아야 한다”라며 자나 깨나 국가와 국민 걱정을 토로(吐露)하셨는데 이렇게 홀연히 가셨다.
남녀고하(男女高下)를 막론(莫論)하고 민주화 동지로, 노동자의 친구로 깊고 넓게 맺어왔던 인연의 끈을 내려놓으시고 저승길로 소풍(消風)을 떠나셨다. 참으로 슬프고, 원통하다.
노심초사(勞心焦思) 나라 사랑, 국민 사랑하는 마음으로 품고 닦아온 뜻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암 진단 두 달 남짓에 그림자처럼 저희 곁을 떠났으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아니 너무나 허전하고, 허무한 나머지 패닉에 빠져 일상으로의 회복이 좀처럼 쉽지가 않다.
평생 물욕(物慾)을 지양(止揚)하시며 청정수(淸淨水) 무균질(無菌質)로 우리 곁을 지켜 주셨기에 더더욱 황망(慌忙)스럽다. 어른이 없는 우리 사회에서, 옳은 말 쓴소리를 하지 않는 지성사회(知性社會)에서 누가 불쌍한 국민을 대변해서 기득권 권력과 기득권 세력을 향해 호통을 쳐 주실지를 생각하면 앞이 멍멍해 진다. 그러기에 선생님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누가 뭐라해도 선생님은 대한민국의 ‘살아있는 양심’이었다. 영원한 재야의 길로 자리매김 되는 일도 순리와 상식을 철칙(鐵則)으로 살아오신 선생님의 신념(信念)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분의 삶 속에서 나라를 바꾸어 보겠다며 발버둥을 쳤지만 권모술수(權謀術數)나 원칙을 외면하는 일탈행위(逸脫行爲)는 찾아 볼 수 없다. 언제나 정도와 기본을 생명처럼 중시하며 조금이라도 양심에 꺼리기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선생님은 대동사회(大同社會)와 녹명사회(鹿鳴社會)를 이 지상에 지고(至高)의 가치로 설파(說破)해 오셨다. 이제 장기표 선생님의 사상과 이념을 공유했던 후배들은 이 일을 위해 사회를 바꾸고, 정치를 바꾸는 일에 고리타분한 진보·보수나 우파·좌파의 찌든 올가미를 벗어 던지고 선생님의 유훈(遺訓)을 따라야 한다.
가신지 10일이 지났지만 선생님에 대한 별칭(別稱)과 어록(語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 영원한 재야 ▲ 민주화 화신 ▲ 노동자의 영원한 친구 ▲ 전태일의 대학친구 ▲ 거리의 혁명가 ▲ 살아있는 양심가 ▲ 재야 운동권의 대부 ▲ 국민 편에 선 시민운동가 ▲ 시대의 몽상가 ▲ 시대의 등불 ▲ 돈키호테 장기표 ▲ 장키호테 ▲ 포청천 ▲ 민주화 운동의 상징 ▲ 청렴결백·청빈한 사람 등이 바로 선생님을 대변하는 아이콘들이다.
선생님은 수십 권의 장서(藏書)와 어록(語錄)들을 남겼지만 많은 어록 중에서 전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어록이 있다. 민주화 보상법이 시행되어 너 나할 것 없이 보상에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국민 된 도리이자, 지식인의 도리로 할 일을 했을 뿐', 민주화 운동 보상금은 ’파렴치한 짓‘”이라고 일갈(一喝)하며 거액의 보상금 신청을 하지 않았다. 족히 10억 원에 육박(肉薄)할 거라는 보상금을 명분(名分)이 없기에 받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선생님은 이상주의자(理想主義者)만은 아니었다. 선생은 지극히 현실주의자(現實主義者)였다. “길을 가는데 술 취한 사람이 쓰러져 있다. 그 사람을 지나치지 않고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상주의자인가, 현실주의자인가?”라며 자신의 인성주의를 표방(標榜)하기도 했다.
민주화 투쟁을 함께 한 고(故) 조영래 변호사는 선생님을 향해 “창랑(滄浪)의 물처럼 살아온” 인생이었다. 터무니없는 자존심, 타협을 모르는 강직함이 그의 ‘죄’였다.“라고 술회(述懷)한 적이 있다.
다 아는 일이지만 선생님은 9년 이상의 옥고(獄苦)에 12번의 수배(手配)를 받아 쫓기며 젊은 시절을 대부분 투옥(投獄)과 수배로 점철(點綴)된 시간을 보냈다.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1971년)을 필두(筆頭)로, 민청학련 사건(1974년), 청계 피복 노조 사건(1977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1980년), 5·3 인천 사태(1986년), 중부지역당 사건(1993년) 등등 주요 시국 사건에 관계되지 않은 적이 없는 박정희·전두환 군부독재에 저항한 그곳에는 언제나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은 많은 민주화·노동계 동지들이 거의 모두가 변절(變節)을 하며 권력의 하이에나가 되어 제도권으로 앞 다투어 들어갔지만(현재도 권력 중심에서 민낯을 보이고 있다) 이들과 달리 선거 때마다 정당을 새로 만들거나 어쩌다가 기존 정당 이름으로 7번이나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김대중·이명박 정부에서 공천(公薦)과 입각(入閣)을 제안받았지만 이 또한 거절했다. “기존 정당으로는 우리나라 고질병(痼疾病)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시 말하면 본인이 대통령이 되어 이 나라를 개조(改造)시켜야 된다는 강한 신념이 어쩌면 운명의 시간까지 그를 붙잡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생님도 동지들이 이해 못할 노년의 변신(變身)이 있었다. 그게 2020년 21대 총선에서 보수의 미래통합당(국힘 전신) 공천을 받아 고향 김해에 출마하여 낙선한 것이다. 이 일 이후 선생님을 따르던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의 동지들 대부분이 등을 돌렸다. 선생님은 필자와 끝내 이 부분에 대하여 갈피를 타지 못한 채 영원한 미제(未濟)를 남기고 떠나셨다.
필자는 선생님을 40년 전에 처음 뵈었다. 굽힐 줄 모르는 강직함에 매료(魅了)되어 가는 곳마다, 계시는 곳마다 찾아다니며 답답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필자가 현직을 떠난 25년전 대학강단에서 ‘시민옴부즈맨공동체’를 결성하자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우리 사회에 가장 절실한 시민운동”이라며 “약자를 위한 서민신문고 운영과 우리 사회 부정·부패를 일소하는 암행어사 활동”에 수석 상임고문을 맡아 행사 때마다 참여하여 힘을 실어 주셨다. 그래서 지금 우리 옴부즈맨 가족들은 더욱 슬픔에 잠겨 있다. 울타리가 무너져 내린 허탈감에 젖어 있다.
2016년 광화문 탄핵 촛불집회에도 함께 여러 번 참가하면서 옛 동지들의 선생 공경(恭敬)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광화문에 운집(雲集)한 수십 백만군도들 중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을 알아보고 찾아와 경외(敬畏)를 표하고 따뜻한 동지애(同志愛)를 나누는 모습에서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尊敬心)이 무쇠처럼 굳어졌다.
선생님은 2017년 탄핵정부가 들어서면서 문제인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을 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2020년 보수 정당의 공천을 받았고, 이재명 성남뜰을 폭로하며 초토화(焦土化)시켰다. 더구나 평생 우호적 동지였던 민주노총을 향해 “망국의 제일 적(敵)”이라고 독설을 퍼 부으며 이들과 결별했다. 따라서 진보(進步)로의 회귀불능(回歸不能) 상황이 고착화(固着化)되어 버렸다.
윤석열 정권 출발이후에는 마지막으로 국회의원 특권폐지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이미 선생님 주변에는 보수와 우파들이 진(陣)을 치며 태극기 부대와 전광훈 당과의 연대도 불사(不辭)하였다. 이 와중에 필자는 “국회의원 특권보다는 대통령 특권이 더 큰 문제”라며 선생님과의 각(角)을 세우기도 했다. 이제 선생님은 이승을 떠났다. 더 이상 선생님은 말이 없다. 이제는 장기표 평론(評論)이 의미가 없는 것 같다.
필자는 5일 동안의 장례를 지켜보았다. 60년의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몇몇 노동계 단체와 동지들이 조문(弔問)을 했고, 그들의 조화(弔花)만 가끔 눈에 띄었다.
보수로 변절하여 권력을 향유(享有)했던 옛 동지들이 민주화기념사업회라는 이름을 빌려 ‘사회장’을 마련했다. 잽싸게 국민훈장 모란장도 추서(追敍)했다. 영정(影幀) 앞부터 윤석열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조화만 빛을 내고 있었다. 사실 그 자리에는 전태일기념사업회나 민주화기념사업회 조화가 자리하는 것이 선생님에게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필자는 집 주변에서 주워 온 밤을 정성스럽게 한 광주리에 담아 영정 한 켠에 올려놓고 큰 절을 하며 오열(嗚咽)했다. 매년 이 맘때면 밤을 주워 보내드렸고, 선생님은 “너무 맛있다”며 매우 좋아하셨다. 다행히 장례기간 내내 영정에서나마 밤을 드릴 수가 있어 다소나마 위안(慰安)이 되었다.
필자는 속이 상했다. 1970년부터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으로 새로운 진보의 지평(地平)을 넓혀 오셨는데 고작 지금부터 7년 전 “권력화 된 운동권과 귀족화 된 노동계를 향해 ‘운동권 사쿠라’”라고 질타(叱咤)하며 우클릭 하였다 하더라도 가시는 마당에 까지 이렇게 금줄을 쳐야 되는 건지, 선생님이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되는 건지 안타깝고, 착잡한 마음 금할 길 없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진보도 책임이 크다. 지금의 명팔이나 명심팔이처럼 언제부터서인가 끼리끼리 권력을 나누어 먹는 민주당의 행태 또한 격한 비판을 받아야 한다. 인성과 자질위주의 인사보다는 금력(金力)과 줄서기 위주의 공천이 만연(蔓延)된 결과가 많은 진보 성향의 인사들을 떠나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일부 민주화 단체에서는 민주화 공원 안장(安葬)을 놓고 영안실까지 찾아와 반대를 했다. 규정 상 안장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들 시위는 선생님의 변절에 대한 애증(愛憎)의 표시가 아닌가 싶었다. 아마도 필자가 아는 선생님은 국민훈장 추서도, 민주화공원 안장도 모두 거부하였을 것 같다.
한 인간의 고귀한 삶을 놓고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참으로 깨끗하고 청빈하게 살다가신 장기표 선생님, 불의와 부정과 한 치의 타협(妥協)도 없이 묵묵히 정도(正道)를 걸어 오셨던 선생님, 누가 뭐라해도 선생님은 이 시대에 존경받아야할 어른이다. 선생님, 이제 아픔이 없는 하늘에서 편히 영면(永眠)하소서!
“당혹스럽지만 살 만큼 살았고, 할 만큼했으며, 또 이룰만큼 이루었으니 아무 미련없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는 선생님의 마지막 메세지가 가슴을 헤집는 아침이다.
선생님 존경합니다. 선생님 사랑합니다. |
옴부즈맨 기자 / ombudsmannews@gmail.com 입력 : 2024년 10월 01일 09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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