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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근대화백의 거장... 삶과 예술의 서민화가 박수근

박수근화가 할머니와 손자 유화 반세기만에 첫 공개
옴부즈맨 기자 / ombudsmannews@gmail.com입력 : 2019년 12월 02일
↑↑ 근대 한국 미술의 거장 고 박수근 화백(사진 =OM뉴스 자료)
ⓒ 옴부즈맨뉴스

[대구,옴부즈맨뉴스] 권병표 대구·본부장 = 박수근(양구 출생 1914~1965)의 삶과 예술은 한마디로 ‘서민화가’로 요약할 수 있다.

박수근은 사후에 더 유명해졌다는 점에서 이중섭과도 자주 비교가 되지만 박수근은 독학으로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하고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이중섭과는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며 노상과 장터 등 가난하고 소박한 일상을 정감 있게 표현했으며, 화가로서의 시작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봄이 오다>가 입선한 1932년으로 볼 수 있다.

↑↑ 박수근 할아버지와 손자 1964년 캔버스 유채/146x97cm/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옴부즈맨뉴스

1936년 제15회 선전에서 <일하는 여인>으로 두 번째 입상을 하는데, 아기를 등에 업고 절구질하는 농촌 아낙네의 모습은 그가 평생 추구한 예술철학을 그대로 보여준다.

1940년 결혼을 하고 도청 사회과 서기, 미술교사, 미군 PX에서 초상화가 등을 거친다.

1953년 국전에서 <집>은 특선을, <노상에서>는 입선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특유의 소박한 인물과 풍경이 굵고 검은 윤곽선에 황갈색의 색채와 두터운 질감, 명암과 원근이 없는 단순한 형태를 보인다.

특히 박수근의 작품은 외국인 미술 애호가들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이는 독특한 조형적 특성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는 이국적이라 할 수 있는 한국적 정취가 강했기 때문이다.

↑↑ 박수근/모자1961년 캔버스 유채 45.5x38cm/현재 국립현대미슬관 소장
ⓒ 옴부즈맨뉴스

그만큼 박수근의 작품은 시대의 풍속이 그대로 담겨 있어 시간이 흐른 후 점차 한국인들에게도 전통적 정취를 불러일으켰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 간 그는 사후에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가장 사랑받는 화가가 되었으며, 그의 작품은 우리나라 작가 가운데 김환기와 더불어 가장 높은 경매가를 기록하고 있다.

2002년에는 그의 고향인 강원도 양구군에 박수근미술관이 개관됐다. 대표작에 <빨래터>, <나무와 두 여인>, <아기 업은 소녀> 등이 있다.

↑↑ 박수근 화백의 할머니와 손자 유채 45.5x37.9cm 한 폭 유화에 할머니와 손자가 있고 뒷 배경에는 여덞명 아낙네와 아기가 있다./현재 개인소장
ⓒ 옴부즈맨뉴스

박수근 화백의 할머니와 손자 이작품은 유화 반세기만에 공개된 작품이며, 1960~1964년 캔버스 유채 (45.5x37.9cm)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작품에 손자를 안고 있는 할머니의 미소가 정겹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한편 인간의 선함을 그린 화가. 독학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한국의 대표적인 화가, 죽은 다음에 유명해져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화가, 그리고 한국에서 가장 그림값이 비싼 화가... 화가 박수근에게는 이 밖에도 ‘국민화가’, ‘민중화가’, ‘서민화가’라는 말들이 따라다닌다.

박수근의 작품은 한 시대의 기록으로서도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서가 향토적 색채로 함축되어 있어 시대를 넘어 오늘날 에도 많은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박수근 화백, 소박한 모습을 통해 한 시대를 진솔하게 표현하다.박수근은 기름병을 담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걸어가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그린 그림을 ‘기름장수’라 명명했으며, 아직 돌에 새겨진 듯 한 두터운 재질이 완성되기 전에 그린 초기 작품이어서 유채의 거친 붓질과 곡선의 윤곽이 살아 있는 그림이다.

그는 검은색 선으로 윤곽을 잡고 굵은 붓질로 질감을 살렸다. 머리가 작고 어깨가 좁은 여인이 기름병이 담긴 바구니를 이고 있어 뒤뚱거릴 듯한데 두 손을 내린 채 걷는 형태에 균형미가 있다. 

박수근은 열심히 살았던 보통 사람의 소박한 모습을 통해 한시대를 진솔하게 표현했다. ‘기름장수’는 박수근이 특히 좋아한 작품이라고 전해진다. 

박수근은 나이 오십이 다 되어서 10년간 살던 집에서 쫓겨나듯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 기막힌 일을 당했다. 이유를 알고 보니 1953년에 구입한 창신동 집이 건물만 박수근의 소유이고 땅은 다른 사람의 소유였다.

구입 당시 부동산 등기를 제대로 살피지 않아서 생긴 일이었다. 결국 국가 정책에 따라 도로가 생기면서 박수근의 집은 반 토막이 났다. 관료들이 도면 위에 도로라고 줄을 그으면 그 줄에 걸린 모든 집이 철거당했고, 그 집에 살던 사람들은 쫓겨났다.

박수근은 집을 시장에 내놓았지만 대지와 분리된 건물이라는 약점 때문에 그 집은 겨우 70만 원에 팔렸다. 그나마도 땅값 40만 원을 치르고 나니 남은 것은 30만 원뿐이었다.박수근은 화실이 따로 없어서 집의 마루를 화실 삼아 사용하고 있었다. 벽 쪽으로 작품을 겹겹이 쌓아두고서 화구를 잔뜩 늘어놓은 채 그림을 그렸는데, 도로가 확장된 탓에 마루까지 없어져 버렸다.

이후 방 안으로 화구를 들여놓고 작업을 하다 보니 온 식구가 화실에서 생활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30만 원으로는 도저히 그만 한 규모의 집을 창신동에 구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1963년 박수근은 창신동보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전농동으로 이사를 갔다.

박수근, ‘기름장수’ 1953, 하드보드에 유채, 29.3×16.7cm ⓒgallery Hyundai 전쟁 이후 생계를 위해 서울 거리에 푼돈을 벌러 나온 여인의 소박한 모습을 통해 한 시대를 진솔하게 표현했다.

할아버지와 손자는 집 문제가 폭풍처럼 지나가고 난 후 박수근이 쇠약해져가는 몸으로 엄습하는 절망에 대항해 혼신을 다해 붓을 들어 완성한 작품이다. 

박수근의 그림을 애호하던 마가렛 밀러 여사는 편지를 주고받던 중에 박수근의 딱한 사정을 접했다.

밀러 여사는 약간의 돈과 함께 다음 해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박수근의 개인전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을 박수근에게 전했다. 극도로 쇠약해진 박수근은 미국에서 열릴 개인전을 꿈꾸며 계속 작업하기 위해 애썼다.

그렇지만 임시 처방으로 치료한 결과 한꺼번에 밀려든 백내장이며, 신장염, 간염으로 말미암아 몸의 고통이 점점 깊어갔다. 무엇보다도 시야가 흐려졌는데 이는 화가에게는 치명상였으며, 이후 그는 백내장 수술을 받았으나 한쪽 눈을 끝내 실명하고 말았다.

박수근은 타 지역보다 돌이 많은 강원도 산간 지방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 돌과의 추억은 박수근의 내면세계의 원형이며, 박수근은 화판이나 종이 위에 캔버스 천을 입힌 후 거기에 흰색, 갈색, 흑색 물감을 나이프와 붓을 이용해 두껍게 여러 층 쌓아올리고 그 위에 인물을 그렸다.

할아버지와 손자는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다. 나는 소장품 전시장에서 이 작품의 원작을 보며 설명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이 작품을 미술관에서 해설할 때에는 다른 작품들보다 조금 거리감을 두고 관람할 수 있게 안내한다.

백제의 마애석불 부조를 감상할 때 멀리서 바라보면 오히려 형태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처럼 박수근의 ‘할아버지와 손자’도 거리를 두고 보았을 때 형태를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까이에서 보면 박수근 특유의 화강암 재질감만 도드라져 보일 뿐이다.

박수근은 우리나라의 석탑, 석불 같은 데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그 미감을 독특하게 표현했으며, 그가 그린 인물들은 두꺼운 질감 속에서 벽화처럼 평면화돼. ‘할아버지와 손자’에는 앞을 향해 웅크리고 앉아 있는 노인과 아이, 하는 일 없이 앉아 있는 두 남자, 길을 가고 있는 ‘얼마 벌이도 되지 않을 물건을 머리에 이고 가는’ 행상하는 두 여인이 있다.

이 그림을 좀 더 눈여겨보면 노인이나 중년의 사내들이 앉아있는 장소와 두 여인이 가고 있는 장소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박수근은 원근법의 단일 시점을 사용하지 않고 입체적인 대상이나 풍경을 평면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마치 모든 대상이 동일한 평면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언뜻 보면 한 장소에 모여 있는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한다.그들은 남녀유별을 지키듯이 부인은 부인끼리, 남성은 남성끼리 있다. 이렇듯 박수근의 그림에서 남녀가 함께한 모습은 찾아보기 드물며, 이 모습은 유교 사회의 인습이 강하게 남아 있던 1960년대까지만 해도 자연스러운 사회 풍경이었다.

한편으로는 돌에 새겨져 멈추어 있는 듯 그려진 인물들이지만 서로 조근조근 이야기를 하는 동적인 자세다. 단순히 시간을 보내기 위해 대화를 나누는 듯 보이는 아저씨들, 이와 대조적으로 일 나가는 어머니들의 힘들지만 건강한 모습, 할아버지와 손자의 끈끈한 정을 표현해 희망을 전달한다.

시야가 흐려지는 것은 화가에게는 치명상이다. 그는 백 내장 수술을 받았으나 한쪽 눈을 끝내 실명하고 말았다. 쇠약해져가는 몸으로 엄습하는 절망에 대항해 혼신을 다 해 붓을 들어 완성한 그림이다.

박수근은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며,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가장 즐겨 그린다”고 말했다. 서민들의 모습과 일상을 꾸밈없이 단순하게 나타내지만, 그들을 향한 측은지심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는 박수근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예술관은 그의 화법으로 이어져 거친 재질을 바탕으로 단순한 선과 무채색을 사용하여 일상을 담아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작품 중 하나인 박수근의 그림은 당시만 해도 국내 인사들의 기호에 맞는 화풍은 아니었다. 그 독특한 화풍과 향토색 짙은 표현은 외국인들의 시선을 끄는 이방인의 기호품일 뿐이었다. 

박수근의 작품은 예전에는 국내에서 거의 팔리지 않았다. 1950년대 말, 우리나라 화단은 유럽의 엥포르멜 추상화풍이 집단적으로 맹위를 떨치던 시기였다.

박수근의 기법은 당시 어떤 화가도 해내지 못했던 것이었으며, 그러한 표현은 한국 미술 사상 최초의 시도로 매우 낯선 것이었다.박수근은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으나 아들로서, 남편으로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조용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농부가 농사를 짓 듯이 시간을 정해놓고 작업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의 근원을 찾아내는 혜안을 획득했다.

박수근은 말했다. “예술은 고양이 눈빛처럼 쉽사리 변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 깊게 한 세계를 깊이 파고드는 것이다”며 “가슴을 울리는 말과 함께 그의 작품은 지금까지도 한국인의 가슴에 오롯이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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