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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 부정선거 첫 내부고발자 고 박재표 선생(사진 = 동아일보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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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 옴부즈맨뉴스] 신웅순 취재본부장 = 4.15 총선을 앞두고 대한민국 첫 부정선거 제보자인 경찰관 고 박재표씨를 재조명하는 글이 동아일보에 게재되어 본지는 이를 재조명하기로 한다.
10일 충남 천안 자택에서 만난 김선월 씨(82)는 3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을 떠올리면 답답할 만큼 고지식했던 모습이 기억난다고 했다.
크지 않은 키에 조용한 성격. ‘정직’이 좌우명이었던 남편은 1956년 동아일보에 경찰의 표 바꿔치기를 고발했던 대한민국 첫 부정선거 폭로자 박재표 씨(1932∼2017·사진)다.
미망인은 “남편은 입버릇처럼 ‘월급쟁이는 한 달 먹을 걸 버는 거지, 두 달 먹을 거 벌겠다 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경찰 때도, 신문사 다닐 때도 당당하고 강직했죠. 허풍을 떨면 그대로 믿어 버려 농담도 못 했어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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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첫 부정선거 제보자인 고 박재표 씨의 부인 김선월 씨가 동아일보 사령장 등 고인의 유품을 보여줬다.(사진 = OM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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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삶을 1972년 동아방송(DBS)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남긴 육성과 가족 인터뷰 등을 통해 재구성했다.
24세 순경으로 전북 정읍에서 근무하던 박 씨는 1956년 8월 도의원 선거 때 투표함을 개표소로 옮기는 일을 맡았다. 임무 중 동료 경찰이 자유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야당 표를 대거 여당 표로 바꾸는 걸 목격했다. 고민 끝에 사표를 쓰고 서울로 상경해 동아일보를 찾았다.
그는 1972년 DBS 다큐멘터리 증언에서 “사회부장님을 만나 환표(換票) 경위를 말씀드렸습니다. 틀림없냐고 해서 지금 사표를 내고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오니 신문에 크게 나와 있었어요. 더 이상 고민은 없고 시원한 마음이 들더군요.”라고 말했다.
8월 29일 기사가 실리자 경찰엔 비상이 걸렸다. 근무지 이탈 등을 이유로 체포령을 내리고 현상금 30만 환과 1계급 특진을 내걸었다. 박 씨가 붙잡히자 경찰은 증언을 조작해 1심에서 실형을 받게 했다. 당시 그는 최후 진술에서 “부모와 선배로부터 거짓말을 하라는 말은 못 들었다. 제가 희생되는 건 좋다. 그러나 옳은 것은 옳은 것”이라고 말했다.
2심에서 무죄 판결로 10개월 만에 석방됐지만 내부고발의 대가는 가혹했다. 경찰과 농림부에서 일하던 형제들은 파면됐고 조카들은 학비를 내기 어려운 처지가 됐다. 박 씨는 어딜 가나 감시 대상이 됐다.
“1959년 초 결혼했는데 선거 때만 되면 병역법 위반이라며 잡아가 군대 훈련을 시켰다. 두 번이나 사라져서 아들을 친정에 맡기고 경찰서 등을 돌아다녔다.”(부인 김 씨)
잠시 민주당에 몸담았던 박 씨는 4·19혁명 후 경찰에 복직했다가 5·16군사정변으로 다시 민간인이 됐다. 국수가게를 차리는 등 여러 일을 전전하다 의인(義人)의 처지를 안쓰럽게 여긴 동아일보의 제안을 받아들여 경비원으로 입사했다. 이후 1990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자재부 등에서 근무했다.
전 동아일보 출판사진부장은 “회사에서 가끔 마주쳤는데 ‘용감한 순경이었다’고 하더라. 사내에서도 매사 성실하고 틀림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퇴직 후 천안에서 텃밭을 일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영정사진이 됐다.”고 회고했다.
손녀 박선영 CBS PD는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셨고 휴가 간 동료 대신 근무했다는 얘기를 자랑 삼아 하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가장 신뢰하는 신문’이라며 동아일보를 보셨다.”고 전했다.
박 씨는 DBS 다큐멘터리에서 당시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옛날 회고라는 건 없습니다. 미련도 없고 다만 앞으로 내가 맡은 일을 충실히 할 작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