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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정재용 기념사업회… 국회서 `창립총회` 열려


옴부즈맨 기자 / ombudsmannews@gmail.com입력 : 2018년 08월 11일 14시 48분
↑↑ 10일 국회의원회관 제2회의실에서 열린 애국지사 정재용 기념사업 창립총회에서 관게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2018.8.10. (사진 = 옴부즈맨뉴스)
ⓒ 옴부즈맨뉴스

[국회, 옴부즈맨뉴스] 원종식 취재본부장 = 애국지사 정재용 기념사업 창립총회가 10일 국회의원회관 제2회의실에서 진행됐다.

이날 열린 총회는 일제의 침탈로 나라를 빼앗기고 국운이 풍전등화같이 위태롭고 암울한 시기에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신명을 다 바친 독립운동가 정재용 선생의 업적 100년을 되돌아 보면서 뜻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 창립하게 됐다.

정재용은 민족대표와 민중들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던 인물로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자로 그는 해방 이후 “독립운동의 최고 정점은 조국통일이다”라고 외친 애국지사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

1919년 3월1일 오후 2시 서울 탑골공원에서 ‘누군가’가 낭독한 독립선언서의 시작 부분이다.

이 선언서 낭독으로 시작된 3·1 만세운동은 이후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을 떨친 사건으로 기록됐다.

당시 민족대표 33인에게 미리 받아둔 독립선언서를 탑골공원에서 낭독한 인물이 바로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전도사로 있던 정재용 지사다. 일제 치하에서 옥고를 치르며 항일운동에 진력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 정재용 지사의 친손자이신 정성화 박사가 기념사업회 회장으로 피선되었다(사진 = 옴부즈맨뉴스)
ⓒ 옴부즈맨뉴스

이날 행사에는 정성화(정재용 지사의 친 손자, 치의학박사)회장, 박유철 광복회장, 정우택 국회의원, 시민옴부즈맨공동체 상임대표 김형오 박사 등 관계자 100여명이 참석했으며, ㈔애국지사 정재용 기념사업회 추진위의 주최와 종로구청 광복회 주관으로 열렸다..

정우택 국회의원은 “일제 강점기에 항일독립운동가 정재용 열사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라며 “100년이 지나도록 3.1운동가의 업적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오늘 많은 분들의 뜻으로 기념사업회를 창립하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며 창립을 축하했다.

↑↑ 1919.3.1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정재용 전도사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다.(사진 = 옴부즈맨뉴스 자료)
ⓒ 옴부즈맨뉴스

[파고다 공원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정재용 지사의 1919년3월1일 행적]

1919년3월1일 정오를 얼마 앞둔 파고다공원은 고종 황제의 인산을 맞아 흰옷 입은 노인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을 뿐 공원 안은 한산했다. 어두운 슬픔의 공기만이 공원을 내리누르고 있었고 그 외의 어떤 분위기도 살필 수 없었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공원을 초조히 오가던 나이 서른세 살 청년은 그것이 불만스러웠다.

“아 이 영감태기들 같으니 대체 이게 뭐하자는 짓이야”가끔 투덜거리는 혼잣말에는 황해도 말투가 배어 있었다. 그는 해주 사람으로 서울 경신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에서 감리교회 전도사로 일하던 정재용이었다

그는 2주쯤 전 서울에서 인편으로 보내온 편지를 보고 온몸이 떨리던 순간을 떠올렸다. “독립선언 날짜는 3월1일 파고다공원 정오 재정은 천도교가 대고, 인원 동원은 기독교가 맡소, 때맞춰 상경하시오” 이제 때가 왔구나 라고 생각하며 흥분을 가라 앉히지 못했다.

고종 황제 인산을 핑계로 해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정재용은 경신학교 시절 음악 강사 김인식이 가르쳐 주던‘애국가’가사의 기억을 짜내며 입안에서 혀를 오물거렸다 올드랭 사인에 맞춘 동해물과 백두산이....그 노래를 가르치다가 경찰에 끌려가‘풍기문란’혐의로 감옥살이를 했던 김인식 선생의 얼굴도 스쳐갔다. 나라가 망했다고 통곡이 진동한지 근10년 이제야 조선 독립의 성(聲)이 터지누나 싶었다.

준비는 착착 진행됐다. 독립선언문은 천도교 계열 출판사에서 인쇄했고, 각 지방의 교회로 독립선언서가 보내졌다. 2월28일 아침 미처 원산 지역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지 않은 것을 알고 민족대표33인 중 하나였던 김창준의 부탁으로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가 경원선 열차에 올라타는 전도사 곽명리에게 선언서를 쥐어줄 때만 해도 다음 날이면 이 모든 긴장이 시원스럽게 터져 나올 줄 알았다.

드디어 3월1일 정오
그런데 파고다 공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기와 머리를 맞댔던 YMCA의 박희도, 원산 가는 전도사에게 독립선언서를 갖다 주라고 발 동동 구르던 김창준을 비롯하여 서른 세 명이라는 민족 대표는 파고다 공원 어디에도 없었다. 전해들은 이유는 좀 어이가 없었다. “그렇잖아도 고종께서 슬픈 운명으로 승하하시어 며칠 후면 인산(因山)날이라 백성들의 심리가 극도에 달해 있는 이때에 파고다 공원에 모인 학생과 군중이 일심하여 다 같이 만세를 부르며 시가로 행진하여 나가게 될 것이고, 그들은 또 전국에서 인산에 참가하기 위하여 올라온 수많은 시민들과 합세하게 된다면 유혈이 극심하게 될 터이니,이를 염려”하여 독립선언을 파고다공원이 아니라 태화관 식당에서 한다는 게 아닌가?

“이거야 원 전쟁을 안방에서 하겠다는 거 아닌가”어떻게 이 절호의 기회에 대표라는 사람들이 유혈충돌을 저어한다는 것인가 그럼 일본이 독립선언에 감동하여 고이 “아 그렇스무니까 우리는 물러가겠스무니다” 할 걸 기대한단 말인가 지난 2주간의 그 긴박한 준비와 죽음을 불사한 각오가 식당 특실에서 펼쳐지는 꼴이라니다. 다윗이 팔매를 들고 골리앗에 나서는 게 아니라 자기 양을 향해 네가 골리앗이라고 선포하는 물색 아닌가 나타나지 않는 민족대표들을 원망하며 애꿎은 돌부리를 차던 그의 눈앞에 거짓말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2시가 가까워오자 어디선지 검은 옷의 학생들이 무더기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학생 동원책이었던 연희학교 김원벽, 보성학교 강기덕이 임무를 완수한 것이었다. 삽시간에 파고다 공원 경내는 수천 명의 학생들로 들끓었다. 황제의 인산 날을 앞두고 인파가 모이는 것을 당연시한 방심일 수도 있었겠지만 일제 경찰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인파의 집결이었다.불 쏘시개는 마련됐고 사람들 마음에 기름은 이미 부어져 있었다. 다만 그 불을 당길 불씨가 태화관 식당 방 안에서 작게 켜졌다가 꺼진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이때 정재용의 머리 속에는 자신의 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종이 한 장이 퍼뜩 떠올라 온다. 천도교인들이 인쇄해 줬던 독립선언서 행여 일제 경찰에 발각될까 옷 깊숙이 숨겨둔 빽빽하게 글자가 적힌 종이 한 장이었다.

순간 많은 것이 스쳐갔다. 내처 내가 읽어 버릴까 명색 민족대표들이 유혈을 우려하여 태화관으로 독립선언 장소를 바꿨는데 행여 내가 감당 못할 사태가 정말로 발생하면 어쩌나 아무것도 아닌 시골 전도사인 내가 독립선언서를 읽으면 군중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잡혀가면 어떻게 될까 일제의 입장에서는 반역을 꾀하는 셈인데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학생 대표 강기덕도 김원벽도 잠자코 있는데 내가 나서도 될까 정재용은 품 안에서 종이를 꺼냈다. 그러나 그 상단에 찍힌 두 글자,독(獨)과 립(立)이 불화살처럼 그의 눈을 찔러 왔다. 왈칵 머리에서 뜨거운 것이 내려왔고, 가슴에서는10년을 쌓아온 가래가 불덩이가 되어 치밀어 올랐다. 마침내 정재용은 오랫동안 금기였던 두 글자를 입 밖에 내고 만다.

“조선” 조선....독립...선언서이 단어를 내뱉기는 그럴 수 없이 힘 들었으나 이 말이 파고다 공원의 창공을 가르는 순간 수천 명의 가슴을 번갯불처럼 내리쳐 찢어 놓았다. 아! 곳곳에서 탄성 같기도 하고 신음 같기도 한 소리가 퍼져 나왔고, 그 잡음들을 내리 누르며 정재용의 독립선언서 낭독이 시작됐다.

“오등은 자에 아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이제 파고다 공원 안에 들리는 소리는 오로지 정재용의 떨리는 육성뿐이었다.
처음에는 가늘던 정재용의 목소리는 점차 우렁차게 수천 명의 귀에 꽂혔다. 정재용이 평생에 잊지 못할 낭독을 마쳤을 때 군중은 일순 침묵했지만 한켠에서 흘러나온 소리에 화산처럼 폭발하고 말았다 “조선독립만세”

누군가 온몸을 활처럼 꺾으며 두 팔을 하늘로 솟구치며 부른 만세였다. 한 마디에 눈물이 솟았고, 만세 소리가 나오기 전에 뜻 모를 괴성이 터졌다. 아아아..으아아...그리고 이어진 합창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이 심경은 당시에 유행했다는 노래 가사에 그대로 담긴다. “터졌구나 터졌구나 조선 독립의 성십 년을 참고 참아 인제 터졌네 뼈도 조선 피도 조선 이 피 이 뼈는 살아 조선 죽어 조선 조선 것일세”

이날 정재용이 끝내 용기를 내지 못하고 독립선언서를 읽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으나 최악의 경우 3.1항쟁은 늙다리 몽상가와 얼치기 기독교인들이 자칭 민족대표랍시고 음모를 꾸몄다가 겁이 나서 태화관 식당에서 만세 부르다가 잡혀간 해프닝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상기된 표정으로 모여든 수천 명의 학생들도“에이 어느 놈이 이런....”하면서 강기덕과 김원벽을 타박하며 덕수궁 앞에 나가 곡이나 하고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 시골 교회 전도사 정재용이 있었고,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날 중의 하나인 3월1일은 천고의 빛을 얻는다. 
옴부즈맨 기자 / ombudsmannews@gmail.com입력 : 2018년 08월 11일 14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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