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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희순의 묘이다.[사진 = 옴부즈맨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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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옴부즈맨뉴스] 권병표 대구경북총괄취재본부장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부자의병(父子義兵) 권희순, 권수경을 소개한다.
나라가 누란(累卵)의 위기에 빠졌을 때, 내 가족과 내 땅을 지키기 위해 들풀처럼 일어난 군대가 의병(義兵)이다.
때는 조선 선조 25년 1592~1598년, 임진왜란당시에 의성(義城)고을의 수성장(守城將) 권희순(權希舜)은 고려 태사공 권행(權幸)의 23世이며 字는 경화(景華)이고 號는 운암(雲庵)이다.
행정공(杏亭公) 식(軾)의 현손, 별시(別侍) 숭조(崇祖)의 증손이며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 사형(士衡)의 손자, 호군 (護軍) 무성(武成)의 셋째 아들이다. 명종 3년인 1548년 무신 6원 3일에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沙村里) 집에서 출생했다.
공은 소시부터 재예(才藝)와 경륜이 특출하고 천문지리와 병학(兵學) 산수(算數)에 까지 박통(博通)하여 향시(鄕試)에 세 차례나 올랐다. 선조 16년, 1583년 계미에 36세로 무과에 급제했는데 창방(唱榜)하는 날 임금이 칭찬하기를 “이는 이른바 문무(文武)를 겸전한 재목 이라고 했다. 이듬해 갑신에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고 선조18년, 1585년 을유에는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가 되었으며 다음해인 선조 19년, 1586년 병술에는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과 내금위별시(內禁衛別侍)를 역임하다가 모친상을 당해 귀가해 집상(執喪)했다.
그 후 선조 25년, 45세인 1592년 임진(壬辰)에 왜란이 일어나자 열읍(列邑)의 수령이 모두 성을 버리고 도주해 버림에 안집사(安集使) 김륵(金玏)에 의해 본군(本郡) 의성(義城)고을의 수성장(守城將)으로 임명돼 경상좌병사 (慶尙佐兵使) 성윤문(成允文)과 더불어 합진(合陣)하여 전공을 세움에 있어 의성의 군액(軍額)이 가장 두드러진 바 있었다.
이에 곧 안동부(安東府)의 판관(判官)으로 제수되었고 선조 26년, 1593년 계사에는 46세로서 장기현감(長鬐縣監)으로 배수되었다. 이때 백성이 기아에 신음하므로 공이 녹봉을 털어 제휼(濟恤)하니 고을 사람들이 크게 감동했다.
선조 28년, 1595년 을미 2월에는 적선 수십 척이 연일(延日)의 직전도(稷田島)로 야습해오니 공이 분음(憤吟)의 시를 읊어, 조수천년백(潮水千年白) 조수(潮水)는 천년을 두고 흰데 병등오야홍(兵燈五夜紅) 병선(兵船)의 등불은 오야(五夜)에 붉구나 남아일두혈(男兒一斗血) 남아(男兒)가 한말의 피로서 직작해천홍(直作海天虹) 곧바로 바다와 하늘에 무지개를 이루리‘ 하고는 곧 정예 장사 3, 4백을 뽑아 대전을 하여 크게 전과를 올리고 적을 참획(斬獲)한 것이 많았다. 이때 홀연히 겨드랑이 아래에 유혈이 낭자한 것을 보고 비로소 유환(流丸)에 맞은 줄을 알았으나 격전에 정신이 없어 심한 통증도 잊고 철야로 성을 돌며 독전했다.
그러나 이때의 무리로 상창(傷瘡)이 더욱 침중케 되니 부득이 관직을 사하고 귀향케 됐다. 고을 백성들이 남녀 모두가 길을 막고 서로 울며 공(公)의 유임을 애원했으며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이르기를, ‘장한 기개는 무거운 바다의 요기(妖氣)를 배제시키고 검소한 덕은 일경(一境)의 파리한 백성을 소생시켰다.
홀연히 떠나지를 못하게 함이며, 주린 백성들이 죽기로써 막으니 그 어찌 떠난 뒤에 잊지 못하는 사모를 얻지 아니할 것이랴 (장기 배중해지침 검덕 소일경지리 모홀거혜기욕사민 안득이 무후사 : 壯氣 排重海之祲 儉德 蘇一境之羸 母忽去兮飢欲死民 安得以 無後思),라 했다.
선조 29년, 1596년 병신에 훈련원 판관(判官)에 제수되고 同 30년에는 오위도총부도사(五衛都總部都事)에 이어 다시 도총부 경력(經歷)에 제수 되었으나 전상으로 인한 신병으로 모두 부임치 못했다. 그러다가 선조 31년, 1598년 무술 5월에 그 신병으로 졸하니 51세였다. 공의 사적은 동사(東史)에 등재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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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수경의 묘(사진 OM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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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의 행장(行狀)은 옥간(玉澗) 박무선(朴茂先)이 지었다. 아들은 증 이조판서(贈 吏曹判書) 자락당(自樂堂) 수경(守經)이다.
정묘란 병자호란시 경상좌도(慶尙左道)의병도유사(義兵都有司)권수경(權守經)은 고려 태사공 권행(權幸)의 24世이며 자(字)는 자정(子正)이고 호는 자락당(自樂堂)또는 사제당(思齊堂)이다. 부정공의 차자 별장공 균량(均亮)의 8대 종손 행정공(杏亭公) 식(軾)의 5대손이다.
별시 숭조(崇祖)의 현손이고 직장 사형(士衡)의 증손이며 호군 무성(武成)의 손자요 장기현감 권희순(長鬐縣監 權希舜)의 아들이다. 선조 17년, 1584년 갑신 12월 26일에 의성 점곡(點谷)의 사촌(沙村)에서 출생하였다.
공은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일찍부터 학업이 두드러졌으나 전란이 거듭되는 난세를 만나 그 뜻을 펴 진취하지 못했다.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전후에 걸쳐 예제를 다하고 여묘(廬墓)를 하며 신석(晨夕)으로 통곡을 그치지 않으니 인근 사람들이 그 사는 곳을 일컬어 효려동(孝廬洞)이라 했다. 상복을 벗자 학행과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제릉참봉(齊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로부터 두문정거(杜門靜居)하면서 성리서적(性理書籍)을 탐구하였는데 그 당액(堂額)을 자락(自樂)이라 했다.
저술로는 스스로 몸가짐을 바로하고 반성해 살피는 요체를 쓴 기여집(起余集) 5권과 감정의 방종을 억눌러 고쳐 나가는 방안을 논술한 담총집(談叢集) 4권을 남겼다.
인조 5년, 1627년 정묘에는 북란(北亂), 즉 호란(胡亂)이 일어나 만주(滿洲)의 노기(虜騎)가 쳐들어와 임금이 강화(江華)로 몽진하자 공은 44세로서 강개한 나머지 동지들을 규합 창의(倡義) 하였는데 이때 경상좌도(慶尙左道) 의병도유사(義兵都有司)로서 활약했다.
그 9년 뒤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또한 창의하여 정묘년과 같이 하였는데 병력을 이끌고 상경 길에 조령(鳥嶺)에 이르러 임금이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내려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와서는 시주(詩酒)를 벗 삼으며 세상일을 잊고자 했다.
그 뒤 인조 20년, 1642년 임오년에 향당의 지주(地主) 엄정구(嚴鼎耈)라는 이가 학교를 크게 일으키고 공을 도훈장(都訓長)을 삼아 후학의 교육과 풍교(風敎)의 진흥에 힘쓰게 했다. 효종 10년, 1659년 기해 정월 23일에 졸하니 수가 76세, 졸 후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경연(經筵)에서 임금께 주백(奏白)해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使) 로 추증되었고 다시 숙종 16년, 1690년 경오에 이조판서로 가증되었다.
그리고 다시 순조 조(純祖 朝)에 영남 유림의 진사 이경(李璥)등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공에게 시호(諡號)를 내릴 것을 청하니 예조에서 의론하여 시장(諡狀)까지 지어 봉상시(奉尙寺)로 넘겨졌으나 역명지전(易名之典)이 내리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
공의 유사(遺事)는 증손자 두정(斗正)이 짓고 행장(行狀)은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이가순(李家淳)이 지었으며 묘비문은 이조참판 이돈우(李敦禹)가 지었다. 시장(諡狀)은 예조판서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조성교(趙性敎)가 지었다. 문집으로 자락당집(自樂堂集) 2권이 간행됐다. |